












가족(家族)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성원(成員). 법적으로는, 동일한 호적 내에 있는 친족의 단체….
사전의 정의를 생각하던 블레비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릿속의 사전을 닫았다. 블레비에게 있어서 가족이라는 건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관계였다.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솟구치거나, 아니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관심이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집 근처의 구약소에 들러 통성명 등록을 하려는 순간에 다시 한번 그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성(成)씨 때문이었다. 일본명으로 등록할 때의 이름이야 원래 이름을 가타카나로 쓴다던가 아니면 괜히 골라봤던 이름을 등록하면 그만이지만, 성씨는 어떤 걸로 해야 하는 거지?
등록명을 쓰려던 손이 멈춘 채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대충 묶이는 만큼을 잡아 묶은 꽁지가 닿아 걸리적거리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한숨을 뱉어냈다. 여기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아내가 따른다는 법이 있었는데, 그럼 바람의 성씨를 자신이 쓰면 되는 걸까?
그에 대해서, 블레비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바람과 결혼을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제 성을 써내는 것도 그리 원하지 않았다.-대게 한자를 변경하기 때문에 이상한 음절로 발음이 되었으니까-
차라리 정말로 써낸다면 네 성을 내 이름의 옆에 붙여두고 싶은데.
병원에 가면 자주 듣는 것이 보호자를 찾는 외침이었다. 한국과는 다르게 누구 씨의 보호자 분, 같은 것이 아니라 그 가족의 성을 부르고는 했다. 만일 그게 바람과 블레비에게 일어난다면 자신은 그의 보호자로 자신을 부르는 것에 쉽게 알아차리고 반응할 수 있을까. 일본은 비슷하거나 같은 성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이에서 의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 확실히 인식할 수 있을까?
아마 알아듣지 못할걸.
그건 당장 내 이름이 아니니까.
아무것도 쓰지 못한 통성명 신청서를 다시 직원에게 내밀고 나왔다. 혼자서 일을 벌여서 깜짝 발표 하나 하려고 하니 복잡하네. 괜한 생각만 들었어. 투덜거림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넌 그런 걸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나중에 해야겠다."
당장에 불리는 이름도 일본인들에게 어려운 발음은 아니니까 상관없잖아? 동료 대부분은 자신의 본명보다는 블레비라는 코드명으로 불렀다.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바람 혼자였기에 더욱 바람이 부르기 편한 이름으로 등록하고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막히게 되니 오히려 힘이 쭉 빠졌다.
아니, 정말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나?
글쎄.
그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뱉어낼 수 없었다.
당연히… 아니지.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본 적 있었다. 오카다 소우타, 그 애의 이름이 적힌 서류 옆에 제 이름이 들어가는 거. 그게 굳이 독고 해후가 아닌 자신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이름으로 적혀있는 것까지. 그리고 이왕이면 구약소에 신청을 넣으려고 한 통성명으로 적혀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뭐랬더라….'
이왕 통성명을 신청할 거라면 하루토로 작성해서 신청하라고 했던가. 구약소에 들리기 전 그래도 통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걸었던 전화에 블레비는 제 부모의 요청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었다. 당신 아들은 난데, 왜 아들보다 아들 남자 친구를 더 좋아하느냐고, 사실 그렇게 따져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버지라는 작자야, 블레비는 당연하고 제 아들의 남자 친구에게도 관심이 없으니, 상관없다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이왕이면 소우타 군이랑 잘 지내보렴. 애가 싹싹하니 착하네.」
"엄마 소우타랑 전화해?"
「가끔 연락하던데? 둘째 아들 생긴 거 같아서 좋더라. 가끔 네 이야기도 들려주고 그래. 그 애가 말해주는 너는 어릴 때랑 다르게 많이 변한 거 같아서 내가 아는 내 아들이랑 다른 거 같다는 생각도 좀 들긴 하는데…」
"아니, 거기까진 안 궁금해."
「…그래. 아무튼 통성명 신청할 거면 '하루토'로 해. 네가 태어나기 전에 일본에 잠시 지냈는데 지인들이 애 태어나면 일본 이름은 하루토가 좋겠다고 추천했었거든.」
"생각해 볼게."
변하긴 변했네. 전화를 끊기 직전에 들려오는 부모의 목소리에, 차마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블레비 본인 역시 제게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부모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루토… 면, 오카다 하루토, 가 되는 건가?"
블레비는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중얼거렸다가 이내 제 입을 가리고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냥 생각만 하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게다가 부끄러워졌다. 그것도 성씨를 가진 주인 몰래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걔는 딱히 그런 생각을 안 할지도 모르는데. 아니, 어쩌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걸 확신하지는 않았다. 바람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그 음성으로 듣지 않으면 어림잡아 그러리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게 됐다.
원하는 걸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겠지.
블레비는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진단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오늘 하려던 일은 실패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다음에는 차라리 무슨 성을 쓸 건지도 생각해서 오자.
그렇게 생각했던 게 얼마 전이었던 거 같은데….
*
그러니까, 불꽃놀이를 보는 것까진 별로 큰 생각이 없었다. 가끔 제 부족한 도파민을 조금이라도 채워주겠다고 제안한 거래에 가깝기도 했고, 또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제게 집중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익숙하면서도 좋아하는 제안이었으니까.
'언제 이런 걸 준비한 건지.’
불꽃놀이를 보러오는 축제라고는 하지만 블레비에게 그 시간은 불꽃놀이가 아닌 그 아래에서 그걸 구경하는 바람을 보는 시간에 가까웠다. 어릴 때 좋아하게 된 것 아래 지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것 더하기 좋아하는 것. 제일 좋아하는 거.
그걸 공식처럼 생각하며 늘 바람을 구경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바람도 불꽃놀이 대신 저를 구경해서 결국 서로서로 구경하는 꼴이 됐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 익숙하고 평범한 일상이기에 더욱 생각하지도 못했다. 갑자기 소원권 이야기를 하기에 블레비는 그냥 소원이라도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니면, 사고라도 쳤던가.-늘 사고 치는 건 자신이지만 말이다. 바람도 은근하게 뻔뻔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가볍게, 정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터지는 불꽃놀이와, 그 아래 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 쌍의 반지를 보았을 땐 순간적으로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멈췄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블레비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것을 보기만 했다는 소리였다.
그 순간을 깨운 건 바람의 목소리였다. 불꽃놀이가 터지는 소리로 뒤덮인다 해도 그 목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었다. 늘 블레비의 신경은 바람에게 고정되어 있으니까. 원래 보석이 아예 없는 디자인으로 할까 했는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멈춘 뇌 기능을 작동시키고 그 손에 들린 것만을 보던 시선을 들어 올리게 만든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영원한 사랑을 뜻한다길래…… 포기하기 싫었어."
불꽃놀이가 터지는 소리 아래 들리는 은은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그 말을 들으며 블레비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졌다. 자신의 취향을 신경 쓴 것은 물론이고, 액세서리에 박히는 보석의 뜻까지 맞추며 포기하기 싫었다는 말에서 블레비에 대한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너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좋아하나 봐.
그런 말을 뱉어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말하기 위해 숨을 들이켜면 불꽃놀이가 터지는 순간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바람의 입을 통해 음성으로 읊어졌다.
"나라도 괜찮으면, 정말 나의 모든 걸 사랑할 자신이 있다면."
자신 없다고 한 적이 없어.
이미 누가 뭐래도 너보다 더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나랑 결혼해 줄래?"
그건 내가 부탁해야 하는 소리 아니야?
"형의 가족이 되고 싶어."
다시 불꽃놀이가 터진다.
몇 번이고 보았던, 이제는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지 못하던 것이 예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게 터졌다. 그 아래에서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바람을 블레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마치 처음 고백을 받았던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니까. 가족이라는 관계를 내가 너와 맺어도 되는 걸까? 혼자서만 바라면서 고민하던 것들의 끝이 화려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블레비는 하지 못했다.
너한테 옮아서 나도 불안함을 안고 있었나 봐.
무심코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네 고백으로 돌이켜보며 알게 됐다. 사랑하면 바뀐다는 소리는 긍정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곤 했는데, 부정적인 부분도 생기게 만드는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언제 준비했어?"
"음, 얼마 안 되긴 했는데…. 형 눈치가 빨라서 알면 어떡하나 했는데, 정말 몰랐나 보네."
"그야 당연하지!"
나 몰래 뭔갈 준비한다던가,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하겠어!
반지 케이스를 들고 있는 바람의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시선이 가까이 맞춰지면 저도 모르게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거 부끄럽네! 진짜 생각도 못 한 청혼이라서."
"눈을 감을 정도야?"
"넌 몰라, 모른다구~…"
블레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놓고 그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끝나가는 불꽃놀이에 맞춰서 먹혀들어 갔다. 난 진짜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너는 언제 그런 걸 준비하고 있었어? 난 상상만 해봤지, 너한테 고백해 보겠다는 생각도 안 했는데. 너 진짜 뻔뻔하고 용기도 있고 또……
길어지는 말들에 변명이 담긴다. 거절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나. 당사자 몰래 혼자 상상만 했던 것들을 현실로 끌고 온 사람이 그 바람인데.
"넌 나로 괜찮아?"
불쑥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블레비는 자신이 그런 걸 물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언젠가 네가 나에게 물었던 것을 제가 돌려주게 되었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블레비에게 있어서 바람의 애정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까. 하지만, 막상 고백을 받으니, 걱정이 든 듯했다. 바람에게 있어서 블레비의 존재는 여전히 의문일 수도 있고, 또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로 보일 수도 있었다. 여전히 많은 것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라서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많을 테고, 그걸 알려주는 어려움이 존재할 테다.
그게 불안처럼 다가왔다. 네가 나한테 실망할 수도 있어. 그 말을 뱉어내는 것이 본인인지 자각도 하지 못할 만큼 무의식에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고 있었지만, 저 밑바닥에서는 혹시나 하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형은 나로 괜찮다고 했잖아."
"그야, 소-쨩은 나랑 다르니까~…"
"나도 똑같아."
나도 형이면 다 괜찮아.
그 말이 어떠한 도화선이 되었는지, 블레비는 손으로 가렸던 얼굴을 들고 바람을 바라봤다. 여전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블레비는 저도 모르게 코끝을 절로 찡그리며 웃었다.
"그럼 나 통성명은 네 성씨로 적어서 신청해도 되는 거지?"
"통명(通名)?"
"구약소에 신청하는 거 있어~ 일본에서 외국인이 쓸 일본명."
"통칭명(通称名) 말하는 거구나."
"맞아, 그거~"
"근데 갑자기 무슨 이름이야?"
"그야…"
순간적으로 블레비의 말이 멈췄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냥 너한테 쉽게 불리는 이름이고 싶었어? 너만 부르는 이름이 있었으면 했어? 끙, 앓는 소리를 다시 뱉어낸 블레비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일본은 결혼하면 성 씨는 남편을 따르니까…"
일종의 수락과 같은 말이었다.
서류상의 네 이름 옆에 제 이름이 적히고 싶다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블레비는, 그러니까 독고 해후는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할수록 바람이라면 무엇이든 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소우타.
내가 그 이름을 받아서 네 옆에 당당히 서도 되는 걸까?
너는 나를 나보다 더 잘 알잖아.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하고, 이젠 생각마저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네가 말해봐.
"내가 네 가족이 되어도 괜찮아?“
오카다 하루토, 라고 네 서류에 내 이름을 당당히 써넣어도 돼?
만약 괜찮다면…
"신혼여행은 어디로 떠날지 생각해 봤어?"
마지막으로 터진 불꽃놀이는 이제까지 터진 수많은 불꽃보다 컸다. 그와 동시에 블레비는 반지 케이스를 든 바람의 손을 잡고 그저 해맑게 웃었다. 언제나 웃던 장난스러운 웃음이 아닌 행복함을 담은 웃음을.
"해야지, 결혼! 네가 아니면 누가 나랑 결혼해!“
그러니까, 어쩌면.
난 너를 만나기 위해 그날 그곳에 갔을지도 모른다고.